글로벌 금융자본의 역사로 살펴보는 미국 지폐 인물들
미국 지폐(연방은행권)는 특이하게도 1913년 연방준비제도가 생기면서 통용되기 시작한 이래 금태환에서 불태환으로 바뀐 점을 제외하곤 100년이 넘도록 화폐개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인물들도 바뀐 적이 없다.
하여, 1913년의 시점에서 미국의 은행권(기득권)이 어떤 인물들을 화폐의 초상 인물로 내세웠는지를 살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지폐에 있는 대부분의 인물들은 베어링 가문과 연관이 깊으며, 지폐의 고액권으로 갈수록 로스차일드 쪽하고 연관성이 두드러진다. 특히 구 100,000 달러의 지폐 모델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충직한 개였던 우드로 윌슨인 것을 보면 코미디는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 500달러 이상은 1920년대 쯤에 발행했다가 1946년에 발행 중단을 하여, 1969년에 불완전 유통 중단한 권종이다. 1971년 닉슨 쇼크로 금태환제가 붕괴된 것을 생각해보면, 로스차일드에서 록펠러로 권력이 넘어오는 전환기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1. 1 달러: 조지 워싱턴
대표적인 프리메이슨으로 영국 런던 프리메이슨 지시를 받아 활동했다.
영국 동인도 회사 이익을 위해 일부러 반연방파 수괴가 되어 미국을 독립시킴.
영국이 미국 식민지를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쓸데없이 많았기 때문.
그러나 미국은 독립 이후에도 영국에 세금을 냈고, 진정한 의미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는 못했다.
참고로, 1790년대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인 미합중국제1은행을 세운 인물이 프랜시스 베어링 인맥.
2. 2 달러: 토머스 제퍼슨
알렉산더 베어링 인맥이자 반연방파로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 프리메이슨을 지원하기도 함.
(프랑스 프리메이슨이 미국 독립 때 미국 프리메이슨들을 도운 것에 대한 보답 차원)
훗날 베어링 지시로, 나폴레옹 소유 루이지애나를 매입해 나폴레옹에게 급전을 마련해주기도 함.
나폴레옹 정권의 배후도 알렉산더 베어링.
1812년 영미 전쟁 직후 미국은 남부 아편과 담배, 면화 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기 시작한다. 알렉산더 베어링은 미국 남부 노예 민주당 지지를 확실히 했다. 알렉산더 베어링에게 산업 혁명은 없었다. 그저 더 많은 땅에 흑인 노예를 데려다가 제퍼슨을 시켜서 아편 만들어 중국에 내다 팔면 그만이었다.
3. 5 달러: 에이브러햄 링컨
링컨의 뒷배는 로스차일드 가문. 링컨 정부의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살로몬 체이스는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으며 그린백 발행을 주도한 인물인데, 로스차일드 가문은 자신들의 미국인 대리인 어거스트 벨몬트를 통해 체이스가 미국 연방을 유지하도록 지원했으며, 심지어 체이스가 다음 대통령으로 되도록 밀어주기도 했다(그러나 실패했다). 참고로, 체이스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지배하는 체이스맨해튼(JP모건체이스) 은행이 만들어졌다. 링컨의 재정고문을 맡았던 샐리그먼 유태인 은행가는 그린백 채권을 영국, 유럽에 적극 판매해서 유통시켰을 뿐만 아니라 북군 제복을 만들면서 적극 링컨을 지지하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미국 대리인이라 소문이 나서 남북전쟁 때 피바디처럼 운신이 어려웠던 모건조차 그린백 채권을 보유하기도 했다.
4. 10 달러: 알렉산더 해밀턴
대표적인 미국의 연방파이자, 미국에 자유시장 경제체제 및 강력한 중앙정부 제도를 도입한 인물.
베어링 입김이 들어간 중앙은행의 설립에 관여했고, 중앙정부가 진 빚을 각 주가 균등하게 갚게 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5. 20 달러: 앤드루 잭슨
베어링 계열로, 프리메이슨. 중앙은행 설립을 반대했다. 이유는 자신의 사금고나 다름없었던 지방 은행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함. 당시 미국 정치인 위드는 앤드루 잭슨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반메이슨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뒤에는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인디언 학살의 원흉.
6. 50 달러: 율리시스 그랜트
남북전쟁 당시 링컨을 위해 일했으며, 남부 수도인 리치몬드를 함락시켰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결과적으로 로스차일드를 위해 일한 셈.
7. 100 달러: 벤저민 프랭클린
미국의 대표적 프리메이슨으로,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과 함께 프랑스 프리메이슨에게 지원을 요청함.
8. 구 500 달러: 윌리엄 매킨리
매킨리는 미국에서 금본위제를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로, 그의 선거 캠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J. P. 모건, 앤드루 카네기, 존 데이비슨 록펠러 이 3명을 들 수 있다. 이 세명이 매킨리한테 후원한 돈만 1,200만 달러였다. 후원을 주도한 사람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 J. P. 모건. JP모건은 대선 개입 계획을 세우고, 이후 카네기와 록펠러를 끌어들여 1896년 대선의 대규모 물량공세를 주도하게 된다. JP모건은 자사 은행들의 거래처를 모조리 압박하여 거래처의 임직원들을 매킨리 대선 유세장에 총동원했다. 그리고 심지어, 일부 주에서는 매킨리를 찍으라고 J. P. 모건 소속 임원들이 대놓고 선거 당일날 투표소 앞에서 유권자들을 겁박했다. 공화당이 직접 하지는 않았다지만, JP모건이 대놓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
참고로 매킨리는 록펠러 쪽하고도 친분이 깊었다. 일단 매킨리가 오하이오주 출신이었고, 그의 아들은 록펠러 2세를 부부를 쿠바 요트 여행 초청을 하기도 했다.
매킨리가 암살을 당한 뒤 매킨리 정부의 부통령이자, 유태계인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는데,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대표적인 로스차일드계이다.
9. 구 1,000 달러: 그로버 클리블랜드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인 JP 모건과의 유착관계로 유명한 그로버 클리블랜드 (민주당)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880년대 후반부터 1890년대 후반까지는 록펠러 가문을 견제하는 여러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1) 셔먼 반독점법
1890년 셔먼 반독점법을 통과시킨 존 셔먼은 오하이오주 출신이었다. (훗날, 펜타곤 보고서를 통해 빅터 로스차일드의 권위를 실추시킨 기자가 로스차일드 가문 텃밭인 케임브리지대 출신인 것을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다.) 오하이오주가 셔먼법을 적용해 록펠러 회사를 해산시키자, 존 D. 록펠러는 회사 본사를 다른 주 회사의 주식도 허용하는 뉴저지로 옮겨버린다.
2) AFL의 미국 재벌 공격
1886년부터 94년까지 AFL 위원장이었던 유태계 사무엘 곰퍼스의 활약 덕택에 유태계 로스차일드가 록펠러, 카네기, 밴더빌트 등 미국산업자본이 대중의 뭇매를 맞는다. (오늘날 한국에서 참여연대가 삼성 공격하는 거랑 똑같은 것이다!) 결국 카네기의 US스틸을 JP모건이 꿀꺽 할 수 있었다.
10. 구 5,000 달러: 제임스 매디슨
매디슨 역시 제퍼슨처럼 프리메이슨으로, 베어링 계열로 분류될 수 있다. 1813년 영미전쟁 때 미국의 대통령이었는데, 베어링 상회는 미영 전쟁 당시 영국이 아닌 적국인 미국에 자금 조달을 하였다.
애초 목표였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미영은 무엇이 급하다고 서둘러 종전한다. 나폴레옹이 없다면 영국은 힘을 모아 얼마든지 미국 워싱턴을 점령할 수 있었다. 영국은 아무런 조건도 내걸지 않고 종전한 것이다. 전쟁하면 당대 당연 배상금 문제가 나오는데 말이다.
알렉산더 베어링이 제임스 매디슨을 부추겨 영미전쟁을 일으킨 까닭은 크게 세 가지다.
1)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영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을 붙인 것이다.
2) 1812년 미영전쟁 미국 쪽 목표는 인디언 학살이었다. 알렉산더는 미영 전쟁을 대충 끝내고, 인디언 땅 서부를 전쟁 좋아하는 인디언 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을 건설하려고 애를 쓰던 인디언마저 잔인하게 학살한 뒤 미국 민주당과 나눠 먹었다.
3) 산업화에 관심이 많았고 미국 북부를 후원했던 헨리 베어링을 견제하기 위해, 미영전쟁을 통해 미국 남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다. 알렉산더 베어링이 아예 미국 남부에 힘을 실어주고자 미영 전쟁을 마치 미국이 승리한 것처럼 만들기까지 한다. 그것이 종전 회담인 헨트 조약 이후 있었던 잭슨 전투이다. 1812년 영미 전쟁 직후 미국은 남부 아편과 담배, 면화 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기 시작한다. 알렉산더 베어링은 미국 남부 노예 민주당 지지를 확실히 했다. 알렉산더 베어링에게 산업 혁명은 없었다. 그저 더 많은 땅에 흑인 노예를 데려다가 제퍼슨을 시켜서 아편 만들어 중국에 내다 팔면 그만이었다.
제임스 매디슨은 베어링 쪽 스파이답게 1816년 미합중국 제2은행의 형태로 중앙은행을 부활시킨다. 이때는 제 1 중앙 은행 때와 달리 미영 전쟁으로 미국 남부가 명분도 있는 데다 정권을 잡고 있으므로 중앙 은행으로 미국 남부 위주 대출 사업으로 실리도 챙길 수 있으니 제 2 중앙 은행을 만든 것이다.
11. 구 10,000 달러: 살몬 체이스
링컨 정부의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살로몬 체이스는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으며 그린백 발행을 주도.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국 대리인 어거스트 벨몬트를 통해 체이스가 미국 연방을 유지하도록 지원했으며, 심지어 체이스가 다음 대통령으로 되도록 밀어주기도 했다(그러나 실패했다). 참고로, 체이스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지배하는 체이스맨해튼(JP모건체이스) 은행이 만들어졌다.
12. 구 100,000 달러: 우드로 윌슨
우드로 윌슨은 로스차일드와 JP모건의 지령에 따라 1913년 연방준비은행을 만들었으며, 국제연맹에 미국을 포함시키기 위해 분주히 애썼던 인물이다 (미국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연방준비은행은 주지하다시피 미국의 통화량과 금리를 조절하기 때문에 미국 경제, 나아가 세계 각국의 통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중앙은행이다. 쉬프와 록펠러가 지분을 갖고 있는 내셔널시티은행과 쿤 롭 은행의 대표를 지낸 밴더립은 FED의 창설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몇몇의 금융가들과 함께 지킬섬에 모여서 구상한 내용이 FED로 구체화되었다고 밝혔다. 밴더립이 언급한 내용은 1910년 11월 20일 전 세계 부의 4분의 1을 대표하는 7인이 조지아 연안에 있는 J.P. 모건의 휴양지인 지킬섬으로 모여들었던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일은 워낙 은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의 퍼스트네임만 사용되었고, 기존 고용인들 대신 참석자들과 전혀 면식이 없는 새로운 고용인들이 시중을 들었다.
비밀 모임에 참석한 7인은 밴더립, 에이브러햄 앤드류(미국 재무부 차관보), 헨리 데이비슨(J. P. 모건 컴퍼니의 선임 파트너), 찰스 노턴(모건이 지배하는 뉴욕 퍼스트내셔널 은행 은행장), 벤저민 스트롱(모건의 부관), 폴 워버그(쿤 롭의 파트너), 넬슨 올드리치(로드아앨랜드 주 공화당 상원의원, 전국 통화위원회 위원장)였다. 이 중 올드리치만 은행가가 아니었는데, 그는 J.P. 모건의 동료였고, 존 D. 록펠러 주니어 워버그의 장인이었다.
FED 창설을 입안했던 바로 그 인물들은 재빨리 FED를 장악했다. 모건계 은행가 벤저민 스트롱은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초대 총재를 맡았고, 폴 워버그는 초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 지명된다. 워버그는 FED의 세부 내용 대부분을 고안했다.
아직까지 이 은행들을 감독하는 이사회 멤버는 대통령이 지명하고 의회가 인준하는 7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게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다. FED는 1913년 창립 이후 단 한 차례로 외부에서 실시하는 객관적인 감사를 받지 않았다. FED의 의장은 여야를 초월한 국제유태자본의 하수인이다(그래서 임기가 긴 것이다). 1960년대 하원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라이트 패트먼(Wright Patman)은 FED를 감사하려고 난리를 쳤지만 실패하고 운영지출분야에 한해서 잠시 감사를 했을 뿐이다. 그가 당시 FED의 의장이던 아서 번즈에게 "당신이 교도소에 있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오?" 하고 물은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