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세기
14세기 중세 유럽에서 발족한 한자동맹(공인길드)은 로마 교황이 롬바드 거리에서 롬바드 상인을 통해 지역 상인들에게 수수료를 얻는 것에 대항하기 위한 차원에서 공인들이 결성한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석공길드가 프리메이슨의 직접적인 모태다.
공인길드는 마스터-도제 제도를 통해 아주 엄격하게 물품을 통제하고, 임금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탓에 마스터에 도달한 공인들이 매우 부유하게 잘 살게 된 반면 도제 이하 노동자들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고, 공인길드의 텃세로 인해 상인길드는 큰 타격을 받았다.
- 1517년
유럽의 한자동맹 체제에서 유래한 자유 석공 조합이 모태인 프리메이슨은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 이후 최상층의 귀족들과 석공조합, 인민대중이 결합한 카톨릭 교회 타도 투쟁 단체로 변모한다. 그래서 헨리 8세가 죽자 크랜머(Cranmer) 대주교가 길드와 조합들을 폐지하려고 했고, 1548년에는 "공예가와 주류업자들의 음모에 대한 법안"이 통과되어 그들의 독점권을 철폐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정부에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이 법안은 1549년 다시 폐지된다.
-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설립된 해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1870년대부터 국제 정세에 본격 개입하기 전까지 국제 외교를 주도한 건 베어링-자딘메이슨,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그리고 영국귀족의 3자 연합의 영국 동인도 회사(1600~1874 (실질적으로 망한건 세포이항쟁 직후인 1858))였다. 동인도 회사는 엘레자베스 1세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그 전성기는 19세기였다. 19세기 동인도 회사의 주 관심사는 첫째 대중국 아편무역, 둘째 영국산 공산품 수출, 셋째 저렴하고 안정된 원자재 및 사치품 수입원 확보였다.
이 회사는 서양에서 선물거래의 시초였는데(동양에서는 이미 송나라 때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음), 식민지원정에서 획득한 재화를 바탕으로 투자자들에게 현금 배당을 했다(상황이 안 좋은 경우, 대신 후추를 현물배당하기도 함).
또한 이 회사는 서양세계에서 최초로 시험으로 직원을 선발한 회사이다. 이전까지 서양의 서양의 공무원 채용 시스템은 집안이나 인맥(추천장)에 의한 채용이었으며 이 전통은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 학생 선발과 회사의 직원 선발에 남아있다.
- 1649년
크롬웰 청교도 혁명으로 유대인 영국 입국이 허가되었는데, 이는 유태인들이 크롬웰 혁명을 물밑에서 지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영국 경제를 유대인이 주도한 바 없다. 당시 유대인 주력이 스페인 추방령 이후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
- 1666년
런던대화재로 너도나도 집을 짓게 되면서, 반가톨릭 개신교 성향을 가진 석공(지식인)들의 정치결사체인 프리메이슨이, 귀족들의 비밀조직에서 보다 대중적인 조직으로 거듭난다. 유럽사회의 소수자로서 유태인들도 프리메이슨 조직에 참가하여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얻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 1688년
명예혁명으로 유태인 주력이 영국왕과 함께 영국으로 본격 이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명예혁명 초기 때도 영란은행 초대 은행장 패터슨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이었을 만큼 주역은 유태인은 아니었다(그 이후 영란은행장인 찰스 몬테규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유태인들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이권에도 많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 1717년
영국 런던에서 최초의 프리메이슨 그랜드 롯지가 만들어진다. 프리메이슨의 중앙통제조직이 생겨났다는 것은 프리메이슨 인기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1727년
영국 귀족들이 중심이 된 300인 위원회(The Commitee of 300, also known as The Olympians)가 최초로 만들어진다. 19세기 말쯤 가면 300인 위원회는 동인도회사의 후신으로 재탄생 되어, 로스차일드 가문과 경쟁 관계가 된다.
1720년대쯤 되면, 영국은 해양을 거의 장악하게 된다. 17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도하는 오스트리아, 18~19세기 보불전쟁 전까지는 루이14세와 나폴레옹이 주도했던 프랑스 사이에서 영국은 유럽 대륙 이권에는 최소한으로 개입하면서 해양을 독점해서 식민지를 장악하는 외교전략을 썼다.
- 1760년
영국에서 조지 3세가 즉위한다. 조지 3세는 1820년 재임할 때까지 임기내내 '허수아비 왕'이었고, 영국 정치의 실세는 동인도회사였다. 독일계인 하노버 왕조의 영국 왕들이 영어도 잘 못하고 정치에 관심도 없었던 것과 달리(조지 1세, 조지 2세, 아버지 웨일스 공 프레데릭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조지3세는 정치에 적극적인 편이어서, 영국 귀족들이 왕을 견제했다. 실권없는 허수아비 왕으로 살다가 화병이 도진 것이지 말년에는 우울증이 도져 정신병에 걸렸고, 결국 1811년부터 1820년 사망할 때까지 왕세자인 조지4세가 섭정을 맡아야 했다.
- 1763년
영국 런던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인 프랜시스 베어링에 의해 베어링브라더스사가 설립된다.
- 1773년
영국 의회에서 '노스 규제법'이 통과된다. 노스 규제법의 특징은 다음 두 가지다.
1) 동인도회사의 특권을 영국 국왕 특허장에서 보장하던 것을 영국 의회 사안으로 변경. 조지 1,2세와 달리 조지 3세는 명예혁명 이후 50년간 집권한 휘그당(금융자본가당)을 멀리하고 토리당(지주당)을 가까이하면서 적극적인 정치 개이븡ㄹ 시도했기 때문이다. 해서, 동인도회사는 의회를 통한 안정 장치를 마련하고자 했다.
2)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 직원을 공무원 격으로 지위를 격상했다. 이는 그만큼 동인도회사 직원 업무가 보다 중요해졌음을 의미한다. 1773년에 영국 동인도회사는 19세기 전반까지 유효한 중국 아편 무역 독점권을 따냈다. 영국은 공식적인 것만도 1729년에는 앞녀 연 이백 상자, 1776년에는 1,000 상자, 1790년에는 5,000 상자, 1820년에는 10,000 상자를 중국에 보냈다.
노스규제법은 동인도회사만 배불리고 영국 시민은 배가 고프다는 비판을 회피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분명 동인도회사가 적자였다. 또한, 더 감독 관리한다고 한다. 허나, 분식회계와 반대인 역분식회계가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얼마든지 수익을 비용 처리하거나, 은폐시킬 수 있었다. (적자라면 왜 영국이 동인도회사 독점권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 1776년
미국 독립이 일어난 해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아닌 동인도회사 작품. 실제 권한이 없던 영국 왕이 반대했음에도, 대중국 아편무역 강화를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심이 되어서 영국, 프랑스, 미국 주요 프리메이슨 세력이 일치단결해서 미국 독립을 한다. 미국 독립 당시 프랑스 국채 이율을 영국 국채 이율보다 두 배 이상 비싸게 책정, 프랑스가 미국 독립을 지원하느라 프랑스 재정이 파탄나서 프랑스 혁명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미국 프리메이슨 세력을 통해 독립전쟁을 부추겼던 이유는 식민지 통치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에서 영토 획득과 영향력 확대는 역설적으로 동인도 회사에게 위기로 다가왔는데, 영토를 획득하여 지배, 통치하게 된 이상 회사는 통치를 위한 비용을 들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무역 활동에만 전념하여 이익을 뽑아내던 상황에서, 무역으로 뽑아낸 이익을 통치에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통치비용을 메꾸겠답시고 인도 현지에서 직원들을 값싼 월급으로 부려먹고, 50%에 달하는 토지세를 징수했으며, 주민들이 작물을 키워 먹고살아야 할 경작지를 수출품인 아편과 쪽 재배지 등으로 갈아엎어 강제로 플랜테이션을 하는 등 온갖 악랄한 짓거리를 자행했다. 영국은 미국에서도 이렇게 할 자신이 없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나날이 부유해지는데 영국인은 반대로 가난해진다는 반대에 직면해서, 동인도회사는 영국이 책임지는 미국 재정을 완전히 해소함으로서 영국 재정난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1776년은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을 편찬한 해이기도 한데, 스미스 역시 프리메이슨으로 추정되는 셀번(Shelburne) 백작 윌리엄 패티와 함께 동인도회사를 위해 일했다. 그가 자유무역을 주창한 주된 이유는 결국 아편무역을 예찬하기 위함이었다. 셀번은 아담 스미스와 적어도 1761년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아담 스미스는 셀번 백작의 아버지, 형제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 1779년
영국 재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베어링 가문의 프랜시스 베어링이 동인도회사 감독이 된다. 이 때부터 베어링 가문이 동인도회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 1780년
프랜시스 베어링의 여동생이 존 던닝(John Dunning)과 결혼했는데, 존 던닝은 셀번 백작의 인맥이었다.
- 1782년
프랜시스 베어링이 영국 정부의 자문 역을 하기 시작한다. 또 위에 언급한 셀번 백작이 영국 총리가 되어 다음 해인 1783년까지 부임하게 된다.
- 1783년
프리메이슨이자 셀번 백작인 윌리엄 패티 총리가 중국에서 아편무역을 스코틀랜드 상인들, 윈저 가문 귀족들과 함께 시작한다. 이렇게 '베어링-셀번-프리메이슨-동인도회사'가 연결된다. 스코틀랜드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 때부터 영국 프리메이슨 귀족들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을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던 곳이다. 스코틀랜드는 영국 산업혁명의 발상지이기도 해서(증기기관을 만든 와트부터 시작해서 주요 인물이 스코틀랜드에서 수학), 여러므로 인상깊은 지역이라 하겠다.
- 1783년
셀번 백작 후임으로 윌리엄 소 피트가 24세의 나이로 영국 최연소 총리가 된다(그의 통치는 1801년까지 계속된다). 피트 역시 베어링 가문의 인맥으로, 많은 자문을 프랜시스 베어링으로부터 받았다. 피트가 토리당(오늘날 영국 보수당의 전신)의 수뇌로서 관세경감 및 자유무역을 주장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당대 동인도회사 정치 입장을 대변했던 휘그당을 2선 후퇴시키고 지방 지주 귀족 정당인 토리당을 내세운 것은 조지 3세가 마치 실권있는 왕같은 착각을 주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프랜시스 베어링은 피트가 동인도회사를 통해 과도하게 전쟁을 일으켜 자원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고 보아 서로 마찰이 있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베어링 형제 가문은 스코틀랜드에서 발흥했기에 아래로는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특히 셀번 백작 윌리엄 총리)들과 깊은 교류를, 위로는 동인도회사에 관여하면서 영국 귀족들과 관계하여 큰 성장을 이룬 것이다.
- 1788년
영국 프리메이슨의 변형 조직으로 중국에 '삼합회' 롯지가 세워진다. 삼합회의 역할이란 쉽게 말해 영국 프리메이슨의 아편 밀수를 위해 도와주는 것이다. 삼합회의 상징이 프리메이슨처럼 피라미드인 것도 잘 생각해봐야 한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는 '왕의 힘'을 상징하며, 그 밑바닥은 왕의 신하로서 봉사하는 노동자들을 의미한다. 종종 육각별 또는 '다윗의 별'로 상징되는 뒤집힌 피라미드는 신적인 권능을 상징하며, 성전기사단 및 오컬트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문양이기도 하다.
오늘날 삼합회는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전히 마약유통책으로서 존재하고 있는데, 벌써 그 역사가 250년 가까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캐나다의 허드슨베이 컴퍼니를 지배하는 P&O NedLloyd은 중국에 아편을 팔아 돈을 벌었던 키즈윅 가문의 회사기도 함.)
-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해다. 프랑스 혁명 자체는 독일 일루미나티이와 프랑스 대동방 프리메이슨의 작품이다.
- 1792년
프랜시스 베어링이 영국이 프랑스 혁명군과 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
- 1793년
동인도회사경영에 기여한 공로로 윌리엄 소 피트 총리에 의해 프랜시스 베어링이 준남작(baronet)작위를 받는다. 준남작은 귀족계급 중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다.
- 1804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른 해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동인도회사 덕택이다. 나폴레옹이 재정 압박을 받아 프랑스 중앙은행을 만들었는데, 이 때 여기에 출자한 자본가들, 또 나폴레옹에게 금융 조언을 한 이들이 동인도회사였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퍼슨에게 미국 루이지애나 땅을 팔아 재정을 안정화시켰던 것도 동인도회사가 배후(제퍼슨 역시 프리메이슨). 때문에 나폴레옹이 당시 피도 눈물도 없는 금융가 놈들이라고 욕했을 정도.
- 1809년
프랜시스 베어링이 중국에서 아편을 파는 Dent & Co를 설립한다.
- 1810년
베어링 가문의 시조, 프랜시스 베어링이 죽음. 동인도회사 권력은 베어링의 가족들에게 계속 이어진다.
- 1812년
영미전쟁이 발발한다.
이 시기, 동인도회사는 미국에서 중앙은행을 설립하려고 했다(아편농장주 제퍼슨, 또 훗날에 프리메이슨 앤드류 잭슨이 중앙은행을 비판했던 것은 자신들 사금고나 다름없던 미국 남부 사설은행 영향력 약화 때문).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영국 수출입산업 보호 및 발전에 그 목적이 있었다면, 동인도회사가 주도해서 만든 다른 중앙은행들이란 자국 수출입산업 보호 및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인도회사를 위한 것이었다.
당대 중앙은행이란 그저 사설은행보다 규모가 큰 사설은행에 불과했을 뿐이다. 동인도회사의 지분에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살짝 숟가락 얹기 정도를 한다.
-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대패한다. 동인도회사는 영미전쟁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유통망을 확고하게 한다. 그나마 있던 유일 군사 경쟁상대이던 프랑스 해군전력이 망가져서 대중국 아편무역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았고, 영국 공산품이 세계 일등 상품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또한, 원자재 및 사치품 수입도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에 메테르니히 체제가 구축이 되는데 메테르니히가 전면에 나선 모양새지만, 실제로는 동인도회사가 배후. 이 때 유럽의 6대 세력으로 베어링 형제 가문이 거론됨.
프랑스 재정을 책임진 리셸리외 공작은 베어링 브라더스가 제시한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수모를 당한 뒤 말했다.
"유럽에는 6대 파워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베어링 브라더스가 그들이다."
이 시기 영국 시티 오브 런던 금융지구와 유럽, 세계를 주도한 것은 로스차일드가 아닌 베어링 가문임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 2대 로스차일드인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워털루 전쟁 때 영국 국채를 헐값에 매입해 비싸게 파는 방식으로 종자돈을 마련하고, 웰링턴 장군 등 영국 정부에게 자금 조달을 해주었던 것을 인연으로 정경유착에 성공하여 부의 발판을 늘려나가게 된다.
같은 해, 영국에서 '곡물법' 논란이 일어난다. 명예혁명 이후 줄곧 부국강병과 왕권견제, 그리고 동인도회사 운영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토리당/휘그당은 이 때부터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보수당/자유당으로 변모하게 된다. 보수당은 지방 귀족 중심으로 단결하고, 자유당은 석탄 매장으로 광공업이 발달한 맨체스터 같은 대도시 귀족 중심으로 단합한다. 아직 기회를 잡지 못해서 성공하지 못한 중소 신흥업자들이 대도시에서 자유당을 지지한다.
- 1820년대
동인도회사가 대중국, 대인도 무역을 장악하자, 로스차일드는 돌파구를 두 곳에서 찾는다.
첫번째로, 그리스 독립전쟁(1821~29)다. 지중해 무역에 숟가락을 얹기 위함이다. 훗날 1870년대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이집트 수에즈운하(홍해와 지중해를 연결)를 장악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두번째로, (훗날 미국 북부가 주도하게 되는) 미국과 유럽의 산업화다. 미국 북부에 집중되었던 운하, 철도 사업 등 산업화에 관여한 것도 로스차일드 가문 대리인들이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철도사업에 열정적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및 미국 제조업 발달을 지연시키거나 조절해야 했는데, 영국 아편무역처럼 다른 공산품도 독점을 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로스차일드는 이에 대항해 유럽 미국 제조업 발달을 통해 동인도회사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자 했다.
- 1824년
미국에서 아편무역을 하는 Russell & Company이 창립된다. 이 회사는 베어링 가문이 많이 관여했는데, 이 회사의 중역 Russel Sturgis는 나중에 베어링 브라더스의 운영을 맡게 된다.
참고로, 러셀 회사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외가쪽인 딜라노 가문이 참여한 회사이며, 로버트 베넨 포브스(Robert Bennet Forbes)와 그의 형제인 존 머레이 포브스(John Murray Forbes)는 러셀 회사의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존 머레이 포브스는 당시 세계 최대 부자였던 청나라의 오병감의 양자가 되어 종자돈을 마련하기도 한다). 미국의 국무부 장관을 지낸 존 포브스 케리가 이들의 후손.
- 1829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공작으로 미국에서 반메이슨 운동이 일어난다(앞서 베어링이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프리메이슨 인맥들과 함께 동인도회사를 운영하였다 했듯이, 프리메이슨은 로스차일드와 경쟁관계였다). 여론의 압력을 받은 뉴욕 주 상원은 프리메이슨에 대한 조사를 단행해 "프리메이슨이 정부 요직을 장악하고 있고, 언론도 프리메이슨의 위세에 눌려 있다."는 사실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당시 프리메이슨이었던 앤드루 잭슨에 대항해 위드가 중심이 되어 반메이슨 정당이 들어선다. 그 위드가 바로 로스차일드 인맥이었다.
- 1831년
반메이슨 운동이 한창이던 1831년, 프리메이슨과 연계되어 있던 하버드 대학의 파이베타카파 비밀조직이 노출되면서 논란은 미국 대학 전역으로 파급된다.
- 1832년
상당히 많은 일들이 있어났던 중요한 해이다.
1832년, 미국의 예일 대학에서는 기존의 프리메이슨 문학 조직을 대체할 새로운 조직인 해골 종단(Skull and Bones)이 만들어진다. 부시와 케리 가문이 대표적인 예일대 해골종단 출신 가문인데, 해골종단은 베어링 가문이 운영하던 러셀 회사와 연결된다(러셀의 창립자 사무엘 러셀의 사촌인 윌리엄 헌팅턴 러셀이 해골종단의 창립자이다).
같은 해, 프리메이슨이었던 앤드루 잭슨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고로 앤드루 잭슨은 대통령이 된 후 미국의 중앙 은행 설립을 반대했는데, 이것만 봐도 프리메이슨이 미국의 연방 준비 은행을 만들었다는 음모론은 그 근거를 잃는다. 이 시기를 전후로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프리메이슨 조직에서 탈퇴하는 소동이 벌어지고, 남북전쟁 이후에는 미국 대학의 친메이슨류 문학 조직들도 대부분 폐관하게 된다. 그렇게 미국 내에서 프리메이슨은 서서히 정치 권력을 잃어간다. 프리메이슨 아편무역 네트워크를 약화시키려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공작이었다.
같은 해, 중국에서 마약을 파는 자딘 메디슨(Jardine Matheson) 회사가 윌리엄 자딘과 그의 사촌인 윌리엄 서덜랜드 메디슨, 그리고 키즈윅 가문에 의해 탄생한다. 훗날, 자딘 메디슨의 운영은 키즈윅 가문이 주도하게 되는데, 베어링 가문은 키즈윅 가문의 자딘메디슨 지분을 일정부분 취득한 바 있다.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케네스이 자딘매디슨 회사 직원이었던 것에서 보듯, 프리메이슨-베어링-동인도회사의 관계는, 프리메이슨-베어링-자딘메디슨으로도 이어진다. 동인도회사-베어링-자딘메디슨-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영국 귀족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는 것이다.
같은 해, 인도 봄베이에서 로스차일드 지원을 받고 유태계 데이비드 사순이 David Sassoon & Co. 회사를 만들어 아편무역을 시작한다. 그는 유태인들만 직원으로 뽑았다. 덴트, 러셀과 자딘 메디슨은 베어링 가문이 운영하는 같은 계열이었고, 사순과 로스차일드 역시 한통속으로 경쟁관계였던 셈이다.
- 1837년
빅토리아 시대가 시작된다. 빅토리아의 치세(1837~1901)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명제에서 보듯, 영국정치의 실세는 여전히 동인도회사였다.
- 1839~42년
로스차일드의 에이전트인 사순 가문의 요구로 영국 정부가 중국을 침략한 제1차 아편전쟁이 일어난다.
- 1848년
마르크스가 노동자 해방 선언을 골자로 한 <노동당 선언>을 발표한다. 마르크스는 로스차일드 인척이었이었으나, 로스차일드를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생각이 당대 로스차일드의 이해관계에 맞아떨어졌다(1871년 파리콤뮌 사태 전까지). 동인도회사-프리메이슨이 자신들 안에서는 자유, 평등, 형제애를 떠들었으나 자신을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던 것에 반해,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태인, 유색인종, 여성, 노동자를 단결시켜 동인도회사에 맞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1853~1856
1853년 10월부터 1856년 2월까지 러시아에서 크림전쟁이 발발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러시아 제국과 연합국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만든 뒤 파리 회담에서 흑해 일대의 영역을 '중립 지역'으로 선언해 상선들의 이동을 자유롭게 만들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가증권 등 유무형의 이익을 취했을 것이다.
이 시기 러시아를 지원했던 것은 로스차일드와 경쟁관계였던 베어링 가문이었다.
한편, 이 시기 노벨 형제는 러시아군에 군수품을 납품했는데, 니콜라이 1세에 이어 취임한 알렉산드르 2세(재임: 1855~1881)는 베어링 형제 가문과는 인연을 지속시키면서 군수품 납품 계약을 파기해서 노벨 형제가 파산하고 만다. 노벨 형제 배후는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의심했을 개연성이 크다.
1880년대 초까지 러시아는 베어링 형제가 지배하는 지역이었다.
- 1858-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난다. 1,2차 아편전쟁 당시 영국의 총리였던 파머스턴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the High Priest of Scottish Rite Freemasonry in the British Empire)이었던 것에서 보듯, 베어링 프리메이슨 동인도회사 세력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 1857~59년
인도에서 베어링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로스차일드 가문이 인도인 동인도회사 직원들을 선동하여 세포이 항쟁을 일으킨다. 세포이항쟁은 회교가 금하는 돼지기름과 시크교가 금하는 소기슴이 범벅이 된 당대 페이퍼 탄환과 관련성이 있다. 당대 페이퍼 탄환이란 돼지나 소기슴을 먹인 방수종이에 납탄환과 화약을 담은 것인데, 사수가 이를 발사하려면 손으로는 힘들어서 입으로 페이퍼 한 끝을 물어뜯어야 했다. 문제는 이 종이에 먹인 기름이 소 혹은 돼지기름을 먹였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세포이항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세포이항쟁에 75개 연대중 44개 연대나 참여한 벵골군과는 달리 봄베이군은 3개연대만 동조했고, 마드라스군은 단 한명도 동조하지 않은 것에서 보듯, 로스차일드는 사순을 통해 벵골군을 지원한 것 같다.
- 1858년
인도에 가진 모든 권한을 국왕과 정부에 넘기는 새로운 인도법이 1858년 8월 2일 하원을 통과하여 정식으로 발효되는 것으로 동인도회사는 청산되었다. 이렇듯, 세포이 항쟁으로 동인도회사 소유가 베어링가문, 프리메이슨, 영국귀족에서 실권없는 영국왕으로 바뀌고, 데이비드 사순(로스차일드)와 동인도 회사 세력(베어링)은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을 하게 된다. 인도인에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총독도 그대로였다. 단지 총독이 동인도회사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영국정부 지시를 받는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흥미롭게도 이 시기부터 라이오넬 로스차일드가 하원의원 의원직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 1859년
베어링이 지분을 갖고 있는 스코틀랜드 소재의 프리메이슨 회사인 자딘 메디슨은 1859년 일본 나가사키에 토마스 글로버 블레이크를 파견시킨다. 대중국 아편무역 독점권을 로스차일드 가문에 빼앗기니, 그 활로를 일본에서 모색하려고 한 첫 시도인 셈이다.
- 1860년
1860년 10월 25일에 맺어진 새로운 평화조약에서 사순 회사는 중국 지역의 8분의 7을 점하는 아편무역 권리를 확보하게 된다.
- 1861년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베어링-동인도 회사는 재기를 노리고자 미국 남북전쟁으로 인한 분단을 꾀했다. 주체가 로스차일드가 아니라, 동인도회사다. 프랑스 로스차일드는 남부를 지원했지만, 동인도회사 외교전략 '묻혀가기'였다. 북부는 로스차일드 가문 핵심인 영국 로스차일드가 지도했으며, 러시아 개혁군주도 북부를 지원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영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북부와 링컨을 지지한 건 우연이 아니었으며, 1820년대부터 미국 산업화에 투자했던 것을 유념해야 한다.
다만 링컨은 남북분단체제보다 남북통일체제를 선호 했기 때문에 동인도회사가 암살했을 가능성 있다. 당대 동인도회사 전략은 '해양강국 영국'이며(17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주도하는 오스트리아, 18~19세기 보불전쟁 전까지는 루이14세와 나폴레옹이 주도했던 프랑스 사이에서 영국은 유럽 대륙 이권에는 최소한으로 개입하면서 해양을 독점해서 식민지를 장악. 1720년대에 가서 해양을 거의 장악. 영국이 지배했던 인도만 해도 육군의 경우 무굴 제국의 전력도 만만치않았었다), 세계 각국을 분단체를 외교전략으로 선호했다(유럽과 동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선긋기).
리만 가문 역시 미국에 대한 투자를 남북전쟁 때부터 시작하게 된다. 리만 가문은 목화를 밀수해서 북군에 팔고, 총을 밀수해서 남군에 팔았다.
이 전쟁으로 인해 훗날 로스차일드가의 대리인이 되는 모건 가문이 북부에 총을 팔아 큰 돈을 벌게 된다. 아편으로 돈을 번 모건, 퍼킨스 가문이 하버드대학에 막대한 돈을 기부한다. 러셀 회사의 존 클리브 그린은 프린스턴 대학에 돈을 기부한다. 오늘날촉 망받는 '아이비리그 대학'의 정체는 사실 '아편중계대학'이었던 셈이다.
- 1861~5년
베어링 가문이 미국의 해외무역 자금조달과 미국의 채권 매각을 독점한다.
- 1863~5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서 훗날일본 신정부를 이끌게 되는 인물들을 자딘 메디슨이 유학시킨다. 1863년 조슈번 사무라이 5명, 1865년에는 사쯔마 번 낭인들은 자딘 메디슨이 영국으로 밀항유학시켜 교육시킨 인물들이었다.
조슈 5 인방 밀항 낭인들이 영국에 도착했을 때 이들을 맞은 것은 런던대학의 화학자이자 프리메이슨 알렉산더 윌리엄슨(1824~1904)이다. 하고, 알렉산더 윌리엄슨 교수를 조슈 5 인방에게 붙여준 것은 자딘매디슨회사 설립자 프리메이슨 제임스 매디슨(1796-1878) 이었다.
자딘매디슨회사는 나이어린 낭인들에게 선박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설립자가 나서서 보호자까지 붙여 주었다. 조슈 5 인방이 유학자금이 바닥났을 때는 재정지원도 했다.
- 1865년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1865년 3월 3일 만들어졌으며, 베어링 계열 영국 자본이 동인도회사가 망하고, 대중국/대인도 아편무역 경쟁력을 로스차일드-사순 세력에게 빼앗기자 만든 은행이다. 최고 경영자의 직책이 동인도회사처럼 감독(Director)인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HSBC는 베어링 가문이 설립했던 덴트가 주요 창립 회사였고, 덴트사의 Francis Chomley가 1864년 8월 6일 열린 첫 회의를 주재했다.
1866년에는 베어링 가문의 미국 대리인이자, 러셀 회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해서웨이 포브스(William Hathaway Forbes)가 HSBC의 임원이 되고 얼마 안 가 감독이 된다. 감독직을 한번만 한 게 아니라 여러 차례 한 것으로 보인다.
러셀 회사 중역이자 포브스 가문의 윌리엄 호웰 포브스(William Howell forbes)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의 삼촌이자, 1879년부터 1880년까지 HSBC의 11번째 감독을 지낸다. 참고로, 포브스 가문의 또다른 일원인 존 머레이 포브스는 아편전쟁 이전 청나라 최대 부호이자 공행의 대표였던 오병감과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고, 그를 통해 중국에 아편을 팔았던 인물이었다.
러셀 회사의 중역이었던 Robert Shewan과 S. W. Pomeroy 역시 HSBC의 국장을 지냈다.
자딘매디슨은 처음에는 베어링 가문이 운영하던 Dent의 존재 때문에 HSBC 참여를 거절했으나, 이후 태도를 바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HSBC 홍콩 본부 옆에는 거대한 프리메이슨 롯지가 세워져 있는데, HSBC 운영주체인 베어링 가문과 자딘매디슨이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 세력을 활용했던 역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 러셀회사의 경우 예일대의 프리메이슨 모임인 스컬 & 본즈(Skull & Bonds)의 창립 주체이다. 부시 가문이 이 비밀모임의 멤버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HSBC의 공식 창립자인 토마스 서덜랜드 역시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예까지 보면 HSBC가 온통 베어링 관련 세력들이 장악한 것처럼 보이지만, HSBC에는 로스차일드-사순 세력도 일부 지분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드 사순의 아들인 알버트 사순은 1865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the Chartered Mercantile Bank of India, London and China를 통해 홍콩상하이은행(HSBC)에 자본을 투자했고, 미국의 앵글로-캘리포니아 은행(후에 웰스파고은행에 인수됨) 설립에도 참여했다. 또한 아서 사순은 HSBC의 이사로서 준비위원회(Provisional Committee)에서 활동했다. 초창기 멤버라는 뜻이다.
HSBC의 아카이브 수집 매니저인 Mattew Edmondsom에 따르면, HSBC 본사가 있던 Wardley House (본사로서 1857년부터 1882년까지 쓰임)는 1864년경 사순 가문 소유였다. HSBC 이사진들은 1864년 사순으로부터 $500에 이 건물을 렌트했고, 1866년에는 $60,000의 돈을 들여 건물의 일부를 취득했다. 1882년이나 되서야 HSBC는 이 건물을 전부 사들일 수 있게 된다. 세월이 흘러 1959년에는 역으로 HSBC가 알버트 사순이 세운 은행 Chartered Mercantile Bank을 합병하게 된다. (참조자료: http://www.fundinguniverse.com/company-histories/hsbc-holdings-plc-history/)
현재까지도 영국 HSBC은행은 자딘매디슨의 키즈윅과 영국 귀족 가문들 소유의 은행이다.
- 1866년
베어링 가문의 미국 대리인이자, 러셀 회사를 운영하던 윌리엄 해서웨이 포브스(William Hathaway Forbes)가 HSBC의 국장이 된다. HSBC는 로스차일드가 아닌 베어링 계열 회사였다.
2008년, HSBC가 <포브스> 지가 자신들의 선조가 운영하던 은행을 세계 2000대 기업 중 1위를 선정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현재까지도 영국 HSBC은행은 자딘메디슨의 키즈윅과 영국 귀족 가문들 소유의 은행이다.
조선에서 병인양요가 발발한다. 어처구니없게도 프랑스 군은 압도적인 병력에도 물구하고 조선에서 결국 철수하게 되는데, 이는 자딘메디슨-베어링-프리메이슨 세력의 개입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일본 막부가 프랑스군으로부터 전술연습을 하고 있었음으로, 조슈와 사쓰마 사무라이들에게 조선도 했으니 자신들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고취시켜주기 위함이다.
- 1868년
일본에서 메이지 혁명이 일어난다. 파머스틴 영국총리, 해리 파크스 주일 공사,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사카모토 료마에게 무기를 줌) 그리고 자딘 메디슨 모두 베어링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부터 프리메이슨 영국 귀족은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를 차려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빼앗긴 아편무역 대신 다른 쪽 투자를 노린다.
- 1870년
자딘메디슨 사원이자 스코틀랜드 프리메이슨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로버의 도움으로 야타로 이와사키가 일본에서 미쯔비시를 창립한다.
- 1870-71년
보불전쟁 때 로스차일드, 동인도회사의 지원으로 비스마르크가 승리한다. 이 전쟁에서 로스차일드와 동인도회사가 합심해서 독일을 지원해주었던 이유는 유럽에서 프랑스만 사라지면 유럽, 나아가 전세계 무역을 이들이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협상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친한 러셀 백작이 나서서 독일 측 비스마르크를 파리에서 만나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진다.
제임스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정부를 통해 모건이 투자했지만 이제는 휴지 조각이 되어버린 프랑스 국채 50억 프랑을 이자까지 쳐서 돌려준다. 모건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측 대리인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파리콤뮌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무관심으로 실패하고, 마르크스는 은퇴한다.
- 1873년
오늘날 세계 1위의 철광석 회사인 리오 틴토가 만들어진다. 오펜하이머 가문이 운영했지만, 마약으로 돈을 벌었던 자딘메디슨의 메디슨 가문이 창립했다. 아돌프 히틀러를 지원했던 슈뢰더 은행도 메디슨 가문을 도왔다. 이 리오틴토의 첫번째 사장이 알프레드 밀너 경으로 페이비안 협회, 라운드 테이블과 연결된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가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으킨 1871년 보불전쟁과 1873년 대공황이 발생하자 경제 위기에 대처하고자 외국인 바쿠 유전 개발 투자를 허용한다. 이에 스웨덴 노벨 형제가 1873년 바쿠 유전을 개발해서 대박이 난다. 노벨 형제는 유조선도 세계 최초 개발하여 바쿠 유전 석유 운송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는데, 시설투자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1883년 로스차일드 가문은 노벨 회사 지분의 절반을 취득한다.)
로스차일드의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 귀족들이 영국 정보부를 창설한다.
- 1874–80년
유태인 디즈레일리(이름을 거꾸로 하면 이스라엘이 된다)가 보수당 총리가 된다. 디즈레일리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굉장히 절친한 사이였다.
* 로스차일드 - 보수당 디즈레일리 - 영국왕이 아편무역 지배 주장
* 베어링 프리메이슨 영국귀족 - 휘그당(자유당) - 동인도 회사가 아편무역 지배 주장
- 1874년
1850년대 후반 일어났던 세포이 항쟁으로 실질적으로 망했던 동인도회사가 드디어 정식으로 해산된다.
- 1875년
나다니엘 로스차일드의 돈으로 영국 정부가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매입한다. 영국 중앙은행은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평균 이상의 이자율을 지급하기로 약속한다.
같은 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다. 운요호는 일본 명칭일 뿐, 운요호를 만든 건 스코틀랜드 조선소. 이 운요호를 수입한건 프리메이슨 글로버. 중고품 운요호를 조선에 고가를 팔아버린다. 글로버는 미쓰비시 야타로 등을 통해 일본에 항공, 철도, 방직, 맥주 기술 모든 것을 전수한다. 일본이 잘 되야, 일본에 투자한 영국 귀족들 재산이 보전되기 때문이다.
- 1880년대
레닌이 '독점적 자본주의 시대'라 지칭했던 1880년대부터 로스차일드 천하가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15년 워털루 전쟁 때 종자돈을 만들고, 1820년대 그리스 문제에 개입한 것을 시작으로 드디어 60여년만에 세계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훗날 록펠러 가문 역시 약 70년 만에 로스차일드 가문을 찍고 세계의 황제가문으로 1973년부터 등극).
1880년대 유태계 사순은 전세계 아편무역 70%를 장악했다. 데이비드 사순의 장남 알버트 사순이 캐롤린 로스차일드와 결혼하기도 한다. 유럽 각 국 중앙은행이 로스차일드 주도로 만들어진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로스차일드 가문 힘이 막강해져서 제국주의 국가 각국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과 모건 가문 균열을 노려 모건 가문에 의존한다. 허나, 모건 가문이 겉으로만 유대인 출입금지 식으로 해놓고, 속으로는 여전히 로스차일드 가문 충직한 가신이었다.
반면, 베어링 프리메이슨 영국 귀족의 권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한다.
쫓겨난 프리메이슨 자디메디슨 영국귀족 그룹은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에서의 식민지 사업과 일본에서 신사업 시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이 식민지사업을 활성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그룹이 바로 페이비언 협회, 라운드 테이블 등이었다).
188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는 유럽에서 미국에서 일시적으로 프리메이슨이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데(로스차일드가 더 이상 프리메이슨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 원인) 프랑스, 대동방파 프리메이슨 프레데릭 바르톨디가 '자유의 여신상'을 건축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바르톨디는 대동방파가 정치적인 내분을 겪은 1875년에 메이슨이 되었고, 1883년 미국 뉴욕시를 바라보고 있는 저 유명한 자유의 여신상을 만드는데, 이것은 프랑스 대동반파가 미국의 메이슨들에게 보내는 우정의 표시였다. 미 연방의회는 1877년 2월 22일 프리메이슨인 워싱턴의 생일 때 프랑스로부터의 자유의 여신상 선물을 받기로 결정했는데, 건축이 시작된 1883년은 미국의 메이슨들이 대동방파 메이슨들과 협력하여 독립 전쟁을 끝낸지 딱 100주년이 되는 해(1783)였다.
- 제1차 보어전쟁(1880-81년)
프리메이슨, 베어링-자딘메디슨, 영국귀족 그룹에 의해 제1차 보어 전쟁이 일어난다. 경제적 지분은 로스차일드가 몽땅 가져간 대신, 정치적 지분은 아직까지 이들에게 남아 있었다.
- 1881년
베어링 가문이 후원하던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다. 범인은 로스차일드 가문 및 이들과 협력하던 영국귀족들이다. 베어링 형제 가문은 이미 1850년대 대인도, 대중국 아편전쟁에서 로스차일드에게 패배한 뒤 영국 정계에서 비주류로 물러난 바 있다.
황제의 암살 이후 1883년 로스차일드 가문은 노벨 회사에 투자한다.
핵심은, 알렉산드르 2세 (1853~1881) 때 로스차일드 가문이 러시아에 투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러시아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주요 국가에서 금융을 장악하고 있었다.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미국 등등. 300인 위원회 주류와 로스차일드 가문이 알렉산드르 2세를 얼마나 없애버리고 싶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1882년
프리메이슨, 베어링-자딘메디슨, 영국 귀족 그룹은 1868년 만든 '외국 및 식민지 신탁회사' 펀드를 통해 일본 국채를 1882년부터 매입하기 시작한다.
- 1883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에 세계 최초의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다. 의료보험법(1883)와 연금(1889)이 그것이다.
이는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프리메이슨, 베어링-자딘메디슨, 영국 귀족들에게 위협적인 조치였다.
300인 위원회 기조는 개인주의, 심리주의, 혹은 관념주의이다. 욕망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 혹은 계몽 사상이란 프리메이슨 사상이다. 프리메이슨의 사상은 내 편은 챙기되, 나와 이해관계가 충돌되는 세력은 없애버린다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사상이다.
석공조합 역사를 살펴보면, 프리메이슨 사상은 노조를 적대시 했다. 프랑스 혁명 때도 노조를 깡그리 무시했다.
프리메이슨이 추구하는 개인 자유가 집단 자유가 되면 같은 자유라도 다른 자유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파시즘, 나삐즘, 맑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도 모두 프리메이슨의 변형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제2차 세계대전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프리메이슨이거나 프리메이슨 변형 조직에 심취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영국 처칠도 프리메이슨, 루즈벨트도 프리메이슨, 히틀러는 신지학+프리메이슨 변형조직인 톨레회(Thule Society) 단원이었다(뿐만 아니라 나치의 핵심인물들은 대게 톨레회 단원이었는데, 세보텐도르프 남작,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히믈러 등이 여기에 해당). 심지어 스탈린도 자신을 임명해준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에 호의를 품었는데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이후로 프리메이슨과 유대인 모두를 숙청했다. (참고로, 스탈린은 로스차일드 상점에서 알바하던 사람.) 이로 인해, 이차대전을 준비하는데 많은 애로가 있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한자동맹 이후로 역사가 오래된 독일 길드, 즉 공동체주의를 부활시키자 보다 조직적으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도모하기 위해 1884년 페이비언 협회가 창설된다.
- 1884년
영국 귀족들은 1884년 페이비안 협회를 창설하여, 오로지 영국과 그 지배계급만을 위한 제국주의를 부추긴다. 페이비안은 존 러스킨의 계몽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직으로, 이 사상에 심취한 인물이 세실 로즈이다. 페이비안 협회란 한 마디로 영국귀족이 식민지 사업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열성적인 조직원'을 만들기 위해, 크리스챤 전도 같이 계몽운동을 할 수 있는 이론가들을 양성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 1885년
로스차일드 가문의 당주, 내티 로스차일드가 1885년 세습남작 작위를 받는다.
미쓰비시 창업자 야타로가 사망한다. 동생 야노스케가 가업을 맡는다. 그 후에는 야타로 장남이 기업 총수가 되고, 야타로 가문 직계 방계들이 미쓰비시 주요직을 독점. 1887년에는 이토 히로부미 정권 하에서 정부 소유 나가사키 조선소를 불하받는다.
- 1888년
세실 로즈가 드비어스 사를 창립한다. 이 회사는 나중에 운영주체가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바뀐다. 남아공 금광을 로스차일드가 독점한다. 오늘날 옥스퍼드 대학에는 세실 로즈 장학금이 남아 있다(페이비안협회-라운드 테이블-옥스퍼드 대학이 한 축, 채텀하우스-빌더버그-로스차일드-케임브리지 대학 가문이 또 다른 한 축).
- 1888~1895년
이 시기, 베어링 자딘메디슨 영국귀족 중심의 HSBC는 중국 정부가 필요한 대부분의 정부 국채를 공급했다. 중국이 내는 전쟁보상금은 HSBC에 거의 연 이자 8%로 지불되어야 했다.
- 1890년
베어링 가문이 본격적으로 몰락한다. 베어링 가문은 아르헨티나의 재정파탄으로 그 기채를 보증하면서 회사가 지불정지 일보 직전까지 빠지게 된 것이다. 베어링 공황으로 영국 경제계는 위기에 직면. 이후 약 100여년간 지지부진하다가 1995년 싱가포르지점 딜러의 무리한 투자로 파산. 오늘날 베어링의 이름은 역사의 유물로 전락했을 뿐이다.
이 시기 즈음부터, HSBC는 베어링보다 완전히 키즈윅 가문 주도로 운영된 것 같다.
- 1894~95년
중일전쟁이 발발한다. 일본 정권이 일본 인민을 착취, 국채를 발행하고, 국채로도 힘드니 자산을 매각하여 영국 귀족 및 로스차일드만 돈을 번다. 일본 정부는 그 자금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이 과정이 매번 되풀이 되었다. 일본 인민이 살기 힘들다고 항의하면 무력으로 진압. 다만 당시 일본은 전쟁할 때마다 승리하여 승전 분위기로 입 닥치게 만들었다.
드레퓌스 사건(1894~1906)이 발생한다. 보불전쟁(1870-71) 이후 프랑스 대동방파 프리메이슨들은 전쟁의 배후가 유태인 로스차일드라는 것을 눈치챘고, 반유대주의를 퍼뜨린다. 특히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 군부 프리메이슨들 사이에서 심각했다. 해서 터진 사건이 유태인 루이 드레퓌스 사건이다. 그런데, 루이 드레퓌스 가문은 오늘날 세계4대 곡물메이저를 컨트롤하고, 아르헨티나 페론 정부를 붕괴시킨 프랑스 곡물 재벌이다. 드레퓌스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에밀 졸라 역시 유명작가가 되고, 1901-2년 기득권이 주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드레퓌스 사건 여파로 프랑스 프리메이슨들은 복지부동이 되고,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던 팔지부 프리메이슨 조직 대동방이 활동 정지 상태가 된다.
- 1897년
로스차일드 가문 주도 하에 시온주의자 대회가 열리니(원래 시온주의자 대회는 가난한 유태인들이 주류였으나, 로스차일드 가문이 바이츠만을 협회장으로 내세우면서부터 양상이 달라진다. 1910년대까지 유태인조직은 큰 성장을 맞이하였다가 로스차일드 가문 전략으로 1920년대부터 연일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에 경계심을 품은 영국 귀족, 프리메이슨, 페이비언 협회 등이 300인 위원회로 뭉친다.
300인 위원회 중 일부 극단세력이 로스차일드 가문 타도를 위해 위서 시온의정서를 유출하여 유태인의 세계지배음모를 폭로한다.
- 1898년
백내장이 발병하고 나서 점차 쇠약해지기 시작한 빅토리아 여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영국이란 나라에 있어 왕의 존재는 상징적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 제2차 보어전쟁(1899년~1902년)
제2차 보어 전쟁이 발발한다. 이 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여론을 동원해 영국의 인권탄압을 비판한다(수에즈운하 매입 때 언론과 파업시위를 통해 프랑스를 비판했던 방식과 동일). 그런 방식으로 프리메이슨, 베어링-자딘메디슨, 영국귀족 그룹이 지배하던 자유당을 몰락시키고, 1900년에 노동당을 만든다. 1901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면서 '빅토리아 시대'가 끝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왕당파(보수당)에서 귀족파로 변신하여 왕 권력을 제한하기 시작하자, 드디어 300인 위원회(프리메이슨 자딘메디슨 영국귀족 세력)과도 이해관계가 일치하게 된다. 이 후, 300인 위원회는 정치외교 (=전쟁기획) 분야에서 실권을 챙기고, 로스차일드는 경제분야에서 실권을 챙기게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십세기에 들어서서 영국 왕가 관련된 주요 유럽왕 족보를 하나둘씩 지우기 시작하는데, 독일, 벨기에, 러시아(로마노프 왕가), 오스트리아 모두 독일계 왕이었다. 이로 인해 앙심을 품은 영국 왕실이 히틀러를 지지. 이차대전 후 독일식 이름을 바꾸었다.
- 1902년
동인도 회사 후신 300인위원회는 영일동맹을 체결한 후 HSBC 은행에서 일본이 발행을 계획한 국채 1000만 파운드 가운데 500만 파운드를 매입한다. 남은 국채를 매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던 중 로스차일드 가신 쉬프가 이를 매입하고 일본 전쟁 국채 조달을 위한 주간사 역할까지 자진해서 맡음. 사실상 영국 귀족 세력과 로스차일드 세력이 짝짝궁이 된 것이다.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찾아간 가네코 겐타로가 그와 하버드 동문으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움직인 건 가네코 겐타로가 아니라 시어도어 루즈벨트 재정담당자 모건이고, 시프와 마찬가지로 모건은 로스차일드 가문 충식한 가신이었다.
- 1904-5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쉬프는 러일전쟁 동안 일본에 2억 달러를 더 지원한다. 러일전쟁은 프리메이슨-베어링-자딘메디슨-HSBC 영국귀족과 로스차일드 쉬프, 모건의 합작품.
- 1905년
러시아 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한 300인 위원회 및 로스차일드 가문의 음모로 러시아 혁명이 발발한다. 러시아 혁명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물론 바쿠유전이다.
둘째, 러시아 국력을 소모시키면서 매킨더 지정학을 완성시키려는 의도이다.
이차세계대전 준비용이기도 하다.
셋째, 사회주의를 병쉰으로 만들어서 자유주의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네번째, 프리메이슨 베어링 세력이 장악했던 러시아를 탈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로스차일드 가문을 적대하는 일부 300인 위원회(특히 베어링 세력)가 페이비언협회를 충돌질해서 19세기 후반부터 유출시킨 위서 시온의정서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해서, 러시아 붕괴는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지연되었다.
대신, 분노한 300인 위원회 주류와 로스차일드 가문이 러일전쟁을 일으켜서 일본이 승리하도록 한다. 일본이 로스차일드 가문의 동아시아 지배를 위한 거점 지역으로 떠오르게 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905년 이전에는 300인위원회 입장에 비해 일본 지원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미쓰비시를 통해 일본 주도하게 된다.
미쓰비시는 초대박이 나서 기술을 이전받아 무기를 팔아 자금을 확보, 그 자금으로 일본 중공업 산업을 주도하게 된다.
1930년 대공황 무렵, 미쓰비시는 자본금 9억엔, 산하회사 120개에 달하는 초대형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한반도 뿐만 아니라 만주, 타이완, 사할린, 남양군도에서 활동하며 식민지의 독점 지배 회사나 마찬가지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재산 관리 회사 역시 로스차일드가 지배권을 갖고 있는 록펠러의 내셔널 시티 은행이었다. 이는 미쓰이 등 일본의 다른 재벌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 1907년
로스차일드 가문 후원을 받은 유태인 마커스 사무엘(Marcus Samuel)이 러시아 바쿠유전 석유를 매매하는 석유유통회사로 큰 성공을 거둠. 그것이 훗날 세계최대 석유회사로 성장하게 되는 쉘(shell)이다. 스탈린은 이 회사의 알바 노릇을 한 바 있다.
- 1909년
드비어스를 만들었으나 로스차일드에게 지분을 헌납한 세실 로즈가 영국 제국주의의 팽창을 위해 '라운드 테이블(round table)'을 만든다. 앞에서 언급한 300인 위원회가 여기에 참가하고, 특히 옥스퍼드의 지식인들인 Milner's Kingergarten이 많이 참가했지만, 로스차일드와 이해관계가 달라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목적은 영국의 부흥이 아니라, 자신들 가문의 부흥이었다.
- 1913년
로스차일드 계열 은행들이 미국 연준을 만들고, 미국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한다. 유태인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반독점법, 1920~30년대 유태인 변호사 루이스 브랜다이스의 지지자들이 이야기했던 독점금지법, 유태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시절인 1934년 만들어진 미국증권감독위원회(SEC)는 모두 로스차일드 가문이 록펠러, 모건 등 미국의 토속 재벌들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 특히 록펠러가 메인 타깃이었다.
- 제1차 세계대전(1914~18)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1차 대전은 비커스(Vickers) 사의 자하로프라는 유태계 영국의 무기 중개상이 많이 개입했는데(대발칸전쟁이라는 '떡밥'을 내세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분열시키려고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비커스 사의 최대주주였다.
로스차일드 및 300인위원회는 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인 척해야 했다. 그래야 전쟁이 '노이즈 마케팅' 효과에 의해 장기전이 되기 때문이다. 해서, 한편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다른 쪽에서는 반전운동을 했다. 베트남 전쟁 때도 같은 일이 재현된다. 전쟁을 결정하자 각국 투자자들이 만세를 부른다. 각국 정부가 세금보다 국채 발행에 열중한다. 전쟁 승리해서 전쟁 배상금으로 받겠다는 것이다. 로스차일드와 300인 위원회가 이 모든 국채들을 매입한다. 300인 위원회 버트런트 러셀이 반전운동한다고 난리를 친다.
하고, 1차 세계대전 결과는 영국 승리였다. 유태인 승리였다. 독일 왕실과 러시아 왕실, 오스트리아 왕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1920년
로스차일드 주도로 최초의 국제 엘리트 모임인 채텀 하우스(RIIA, 영국 왕립 외교협회)가 만들어진다. 이 모임을 본따 1921년에 만들어진 것이 미국외교협회(CFR)이다. 훗날 이 채텀하우스가 더 발전된 형태가 1954년의 빌더버그 모임으로, 빅터 로스차일드의 친구인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공이 만들었다.
1920년은 300인 위원회의 입김으로 프리메이슨이자 반유대주의자인 헨리 포드가 시온의정서를 대량으로 유포한 해이기도 하다.
최초의 시온의정서는 로스차일드 가문 견제와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막고자 300인 위원회 비주류였던 베어링형제 가문이 기획하고, 페이비언협회에서 위서 시온의정서를 제작했을 것이지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건, 1920년부터다.1920년대의 시온의정서는 오히려 로스차일드 가문에 협력하던 300인 위원회 주류 일타삼피 기획이었다.
첫째, 소련에서 트로츠키 위상을 축소시킨다.
오늘날까지 유대인 음모론 중 주요 주장이 소련 지도부가 모두 유대인이라는 주장이다. 레닌 쿠데타 당시 주요 인사인 레닌, 트로츠키, 카메네프, 지오비예프, 스탈린 중 스탈린을 제외한 인물이 모두 유대인이었다. 시온의정서는 스탈린이 지도자가 되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스탈린이 헨리 포드를 좋아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둘째, 소련 외 나라에서 반유대주의 민족주의를 부추긴다. 위서, 시온의정서는 유대인 선민주의를 강조한다. 우리도 유대인처럼 하는 유대인 따라하기가 유행일 수밖에 없다. 해서, 무솔리니 파시즘, 히틀러 나찌즘, 일본 천황제를 만든다. 이는 이차대전 준비용이었다.
셋째, 위서, 시온의정서는 반공주의를 강화시켰다. 소련=유태인이 지배하는 시온국가=사회주의 노동투쟁은 모두 악, 이라는 이념을 만들어낸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경제 불황은 심각했고, 로스차일드 및 300인위원회는 이를 무마시킬 필요가 있었다.
- 1927년
1921년 3월 16일 통상협정, 1924년 2월 1일 소련 승인 등 소련 국가 승인을 주도하던 영국이 갑자기 1927년 5월 소련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한다.
- 1929년
영국의 소련과의 국교 단절은 300인위원회가 스탈린에게 인민들을 다 죽이고 사회주의를 해보라는 위협적인 제스쳐였다. 스탈린은 어쩔 수 없이 케인스주의를 소련에 도입한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지시해서 소련에서 시험한 것 중 좋은 것만 부각시켜 각국에 널리 전파시킨다. 그 결과 1929년에 300인위원회가 배후인 영국이 스탈린과 다시 국교 수립을 한다. 1929년에는 세계적인 대공황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대공황에 신음하던 각국에서 각자 방식으로 받아들여 경쟁이 치열해지니 히틀러, 무솔리니, 루즈벨트, 일본 군국주의를 만들고 이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케인즈 논리란 건설 경기로 실업자 사라지고 잘 살게 된다는 뻔한 스토리다.
핵심은 무한반복 투자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투자금 이야기가 쏙 빠지는 게 케인즈 논리의 맹점이다.
투자금 마련을 국가의 화폐 발행으로(양적완화)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인플레이션을 고려하면 이는 임시방편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런 케인즈 이론을 현실에서 맞는 듯이 보여주는 것이 로스차일드, 300인위원회의 권능이었다.
- 중국 혁명과 HSBC
신해혁명(1911)의 주역이자 중화민국 초대 총통인 쑨원(손문)의 아내는 송경령이었는데, 그의 처남은 하버드에서 교육받았고 사순 일족이 지배하던 중국중앙은행의 총재였던 송자문이었다. 앞서 로스차일드의 동아시아 지배전략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순 일족은 19세기부터 로스차일드의 중국 연락책이자, 아편무역 대리인이었다. 그렇게 로스차일드-사순-송자문-쑨원이 연결되는 것이다.
한편 쑨원의 후계자이자 송경령의 동생인 송미령과 결혼했던 국민당의 장제스(장개석)는 쑨원 사후(1925) 중국 최고의 실권자가 되어 송자문과 협력한다. 그렇게 사순 그룹은 일본 근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자딘 메이슨과 함께 1927년부터 1942년까지 홍콩과 샹하이에서 아편 판매를 하여 큰 돈을 벌고, 홍콩 상하이 은행(HSBC)을 관리했다
- 제2차 세계대전(1939~45)
제2차 세계대전은 300인 위원회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고, 빅터 로스차일드과도 케임브리지 사도회 동문이던 버트런트 러셀이 기획한 것이라는 얘기가 있다. 이미 보어전쟁 이후 자유당이 몰락하고, 왕당파 대신 귀족파가 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300인 위원회와 공통의 이해관계를 추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한 바 있다.
흥미롭게도 제2차 세계대전 지도자들의 공통점은 이들이 프리메이슨이거나 프리메이슨 변형 조직에 심취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일부러 300인위원회와 로스차일드 가문이 프리메이슨 세력을 2차 대전의 지도자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 처칠도 프리메이슨, 루즈벨트도 프리메이슨, 히틀러는 신지학+프리메이슨 변형조직인 톨레회(Thule Society) 단원이었다(뿐만 아니라 나치의 핵심인물들은 대게 톨레회 단원이었는데, 세보텐도르프 남작, 디트리히 에크하르트,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히믈러 등이 여기에 해당)
심지어 스탈린도 자신을 임명해준 유대인과 프리메이슨에 호의를 품었는데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그 이후로 프리메이슨과 유대인 모두를 숙청했다. (참고로, 스탈린은 로스차일드 상점에서 알바하던 사람.) 이로 인해, 이차대전을 준비하는데 많은 애로가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빅터 로스차일드와 그의 케임브리지 5인방이 맡은 임무는 스탈린이 전쟁을 하도록 선동하는 것이었다.)
또한, 유태인에 비판적이었던 포드가 프리메이슨 회원으로 나치 히틀러를 지지하고, 유태인 세계정부 음모론(=시온의정서)에 심취했던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로스차일드 가신이자 빌더버그 멤버였으며, 베트남전쟁 때 국방부장관을 지낸 로버트 맥나마라가 포드자동차 사장이 되어 1970년대 포드사를 말아먹고, 도요타자동차를 부흥시킨 바 있다.
- 1954년
한국전쟁을 통해 냉전을 성공적으로 설계하여 빅터 로스차일드가 영국 자본 중심 국제투기자본의 황제로 떠오른다. 그렇게 해서 만든 조직이 나치와 협력했던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왕자와 만든 빌더버그다.
한국 전쟁 전까지 버트런트 러셀을 위시한 300인 위원회와 로스차일드 가문간 반목은 없었다. 허나, 1950년대 빅터 로스차일드가 빌더버그를 창설하면서부터 버트런트 러셀과 로스차일드 가문간 대립이 시작된다. 이에 로스차일드 가문 내에서 우려가 나왔고, 에블린 로스차일드가 빅터 로스차일드 행보를 비판했던 것이다.
- 베트남 전쟁(1955-75)
로스차일드 가문이 설계한 대표적 냉전인 월남전 때 HSBC는 마약 자금을 세탁하는 역할을 했다. HSBC 은행이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약으로 수익 창출하는 은행이었을 뿐이다.
- 1971년
베트남전쟁의 여파로 '닉슨 쇼크'가 발생, 달러 중심 금본위제가 붕괴한다.
- 1973년
빅터 로스차일드가 데이비드 록펠러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쉘 중심의 석유회사에서 엑슨모빌/OPEC 중심으로 석유시장이 개편되고, 미국 달러가 석유 기반 기축통화 체제가 된다. 빌더버그 시대가 끝이 나고, 삼극위원회 시대가 시작된다.
로스차일드 가문 소속 미국 영국 유럽 귀족들은 록펠러 가문으로 전향, 1970년대에는 넬슨 록펠러를 중심으로 뭉쳤으나, 넬슨이 데이비드 록펠러에게 암살당한 이후 1980~99년까지 구심점을 잃고(특히 91년 소비에트 붕괴가 큰 역할을 했다) 뉴라이트에 밀려 세력이 약화되었다. 단, 부시 가문은 이들 세력에 속했다.
- 1990년대
* 1990년대까지 HSBC의 임원에는 자딘메디슨의 키즈윅 가문이 들어가는 것이 관레였으나, 그 이후에는 대중들의 시선 때문인지 좀 더 조심하는 것 같다. Alasdair Morrison은 90년대까지 HSBC에서 키즈윅 가문을 대표하는 임원이었다.
http://www.scmp.com/article/178916/jardines-director-leaves-hsbc-board
* 영국 은행 중 두바이의 금거래를 장악한 은행이 HSBC로, HSBC는 1999년 레바논 은행가인 Edmund Safra의 Republic Bank를 매입한 바 있다. 2000년대 중동 두바이 붐의 열기는 로스차일드/HSBC 세력이 조장했고, 2008년 금융위기로 두바이의 거품이 꺼지게 한 것은 록펠러 세력이 조장한 듯 싶다.
한국의 이명박은 대통령 후보 때부터 두바이를 방문하고 “새만금을 한국의 두바이로 개발하겠다”며 앞장서 ‘두바이 따라 하기’를 독려했으며, HSBC 임원 출신이자 두바이국제금융센터기구 회장인 데이비드 엘든을 대통령직 인수위원과 국가경쟁력강화특위 공동위원장으로 전격 발탁하기도 했다.
데이비드 엘든은 “한국이 두바이 같은 금융허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규제 중복부터 풀고 금융 서비스의 완전한 개방을 꾀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중 설파한 적도 있다.
* 1999년, 데이비드 록펠러가 록펠러 가문 숙원사업이던 로스차일드 계열 간판은행 JP모건을 흡수하게 되면서 로스차일드 시대는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이제는 로스차일드 자본에도 록펠러 자본이 하나둘 섞여 있음이 이상하지 않다.
75년부터 83년까지 자딘메디슨을 관리했던 David Newbigging은 JP모건체이스의 고문이며, JP모건체이스의 계열사인 Morgan et Cie의 회장인 Lord Cairncatto는 HSBC 영국지부 이사진이다. Cairncatto는 RIIA(채텀하우스) 멤버이자, 모건그렌펠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모건그렌펠은 1989년 도이치 방크가 매입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JP모건을 흡수한 것에 대한 무마책으로 구 로스차일드 기업들을 21세기 초반 일시적으로 급속하게 성장시켜준다. 한국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김대중과 김영삼이 빌더버그에 참석했는데, 데이비드 록펠러가 JP모건 인수 이후 전향한 귀족들에게 한국 알짜기업들을 선물로 주기 위한 작업이라는 얘기도 있다.
...
과거의 동인도회사 (베어링-자딘메디슨, 프리메이슨, 영국귀족 3자 연합) 및 페이비안협회/라운드테이블/300인위원회 세력은 20세기 이후에는 과거의 경쟁관계는 온데간데 없고 로스차일드 가문과 완전히 혼연일체를 이뤄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 것 같다.
가령,
- 2004년까지 전세계 금가격은 매거래일의 오전 10시 반과 오후 3시에 런던, 파리, 취리히에서 결정되었는데, 런던이 가장 중요했다. 런던의 경우 N M 로스차일드 은행의 주도로 바클레이즈 은행, 도이치 은행, HSBC 은행, 스코시아은행, 소시이테 제너랄이 금 값을 조정해 왔는데, 여기서 HSBC가 20세기 이후 로스차일드 계열 은행이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HSBC 이외의 은행은 전부 로스차일드 가문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1. 바클레이즈 은행: 2007년도부터 2012년까지 바클레이즈의 회장이었던 마커스 아기우스(Marcus Agius)는 에벌린 로스차일드의 딸과 결혼하여 서로 인척 관계이다. 마커스는 예전에는 BBC의 선임 집행위원이자, 리자드 LLC의 부회장이었다.
2. 도이치 은행: 도이치 은행의 자회사인 모건그렌펠(1999년 편입됨)은 로스차일드가 투자했던 모건계 회사였다. 1930년대 대공황에 직면하여 모건 상사는 세 개의 회사로 나뉘었다: 상업은행은 JP모건, 투자은행은 모건스탠리, 유럽은행은 모건그렌펠.
3. HSBC 은행: 로스차일드 가문이 사순 그룹, 자딘 메이슨과 함께 오랫동안 운영해온 곳.
4. 스코시아은행: 캐나다 최대 규모의 은행인 RBC가 이 은행의 최대주주인데(7.88% 보유), RBC의 상임이사로 은행단 융자를 담당하는 사람이 리처드 로스차일드(Richard Rothschild)이다.
5. 소시이테 제너랄: 이 은행의 경영자인 미카엘 시쿠렐(Michael Cicurel)은 에드먼드 로스차일드 매니지먼트의 의장이며 Rothschild & Cie Banque board의 의장이기도 하다. 또 에벌린 데 로스차일드-크러치필드(Baroness Chantelle Evelyn de Rothschild-Crutchfield)는 이 은행의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로스차일드는 HSBC를 위시한 이들 다섯개의 은행들을 활용해 매일 300만~400만 온스의 금이 거래되는 런던금시장협회(LBMA, London Bullion Market Association)을 지배하고 있으며, 금 가격의 등락에서 막대한 차익을 얻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현재 킴벌리 프로세스(Kimberley Process)를 통해 전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수출입을 감시하고 있다.
(다만, 2015년 상반기까지 국제 금 거래소는 런던에 있었지만, 지금은 상하이 거래소에도 생겼으며, HSBC, UBS AG, JP모건체이스, 골드만삭스, 바클레이즈, 노바스코샤 등 7개 은행이 금가격 결정에 참여하여 전세계에 유통시키는 중. 록펠러 계열 지분이 늘어난 것.)
- 에벌린 로스차일드가 1982-2003년까지 운영했던 스위스 소재의 Rothschild Continuation Holdings는 자딘 메디슨이 지분 20%를 소유한 바 있다.
- 96년부터 2001년까지 NM 로스차일드 & Sons의 매니저를 지낸 아담 필립 찰스 키즈윅은 자딘메디슨 태평양의 최고 경영자이다.
- 자딘 메디슨의 회장인 아담 키즈윅은 로스차일드 은행의 고문이며, 페라리의 임원이기도 하다. 홍콩의 유명한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은 키즈윅 가문 소유다.
- 사순 가문의 후손인 데이비드 사순은 이스라엘에서 키즈윅 가문의 HSBC Private 을 맡고 있는 듯 하다.
- 2009년 10월에 HSBC는 로스차일드 은행 출신의 M & A 전문가를 영입했으며, 2015년 12월에 HSBC는 private bank restructuring을 로스차일드 은행에 위임.
- Lord Armstrong of Ilminster은 로스차일드 계열 로열더치셸 임원이자 N. M. Rothschild & Sons, 리오틴토(자딘메디슨이 창립했고 오펜하이머 가문이 운영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Inchcape(PONC의 모회사)의 임원이다.
- 또 다른 로열더치 셸 임원인 Sir Peter Baxendel도 리오틴토의 임원이다.
- 리오틴토 임원인 Sir Mark Turner은 데이비드 키즈윅이 운영하는 HSBC의 자회사 사뮤엘 몬태규의 임원이다.
- 베어링 세력이었던 Swire가문의 후손 Sir John Swire은 오늘날 로열더치셸의 임원이다.
- HSBC 임원인 윌리엄 존스턴 키즈윅은 BP Amoco 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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